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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야로슬라브나의 삶과 유산
1030년경에 태어난 안나 야로슬라브나는 야로슬라브 1세의 딸들 중 막내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모국어인 스웨덴어, 고대 동슬라브어,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알고 좋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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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 앙리 1세는 그의 첫 번째 부인 프리시아의 마틸다가 사망한 후, 1040년대 후반에 18세가 된 안나에게 청혼했다.
공주는 1050년에 키이우를 떠나 랭스로 이동했고 1051년 5월 19일에 앙리와 결혼한 후 왕관을 썼다. 안나는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진행한 첫 번째 프랑스 여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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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안나와 앙리는 필립, 로버트(어린 나이에 사망), 휴라는 세 아들을 낳았다.
1060년 8월 4일에 앙리가 사망한 후, 안나의 아들 필립이 왕위에 올랐다.
안나의 이름과 서명이 있는 여러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여전히 정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안나의 서명은 1063년 소종스에서 성 크레핀 대주교를 위해 발행된 문서에 새겨져 있다. 고대 동슬라브어로 쓰여진 "Ana Reina" 이 서명은 는 라틴어 "Anna Regina"의 키릴 문자 음역으로 해석된다. 두번째 단어 의미는 고대 프랑스어 철자 "reine(여왕)"일 가능성이 높다.
1062년에 안나는 사라고사의 성 빈센트에게 헌정된 상리스 예배당의 복원을 위해 넉넉한 금액을 기부하고 토지와 수입을 물려주어 오늘날까지 교회의 지속적인 존립을 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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