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인은 왜 러시아에 친척이 있는가?

anamong 2023. 5. 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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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는 누가 사는가?

 

70%가 넘는 우크라이나 인구의 대다수는 우크라이나인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100개 이상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은 러시아인이다.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830만 명 이상의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했으며 이는 전체 인구의 17.3%에 해당한다.

 

소련의 선전 포스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재결합의 300년. 우리의 힘은 형제애에 있다."

왜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인들의 수가 계속 증가했는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국경은 역사를 통틀어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로 또는 그 반대로 이주한 주된 이유다.

 

2001년 마지막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동부 우크라이나 도시인 도네츠크에서 우크라이나계는 인구의 46%에 불과한 반면 러시아계 48%를 차지했다. 크름반도에서는 인구의 58%가 러시아인, 24%가 우크라이나인, 12%가 크름 타타르인이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우크라이나 지역의 러시아인의 수는 러시아 제국과 이후 소련의 정책인 강제 이주 및 추방으로 인해 증가했으며, 이 정책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인의 통일»이라는 러시아 제국 및 소련 선전 네러티브에 기여했다.

 

10-13세기의 키이우, st-sophia.org.ua 웹사이트 레이아웃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형제 민족"이라는 신화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그리고 대부분의 리투아니아인들의 기원은 중세 «루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인들이 그들이 퍼뜨린 «민족의 통일»이라는 신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것은 이 사실이다. 실제로 9세기에는 키이우를 중심으로 한 루스 중세국가가 세워졌고, 이 국가는 이후 수세기에 걸쳐 키이우 왕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영토를 통합했다. 모스크바는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12세기 중반쯤에 최초의 러시아 도시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은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 근본적으로 다른 통치 체계와 가치 체계에서 서로 다르게 발전했다.

 

1891년 키이우 지방에서 결혼식. 화가: Mykola Pymonenko

러시아인들은 15세기부터 우크라이나 영토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부터, 우크라이나 영토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즉시 우크라이나를 제국의 일부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을 용해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은 계속 러시아화를 실시하였고,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관습을 금지하였으며, 러시아의 규칙(예를 들어, 더 엄격한 사법 규범)을 도입하였다.

 

또한 1917년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의 현대 북부와 동부 지역은 러시아 영토를 포함하는 행정 구역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인구는 더 눈에 띄게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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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서 박해받는 사람들의 아이들. 문구는 "수용소. 출입과 안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는 금지며 이를 어길 경우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소련 때 우크라이나인들의 강제 추방

 

소련 정권은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대규모 범죄와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소련 정부는 테러, 추방, 박해, 탄압, 처형, 탈쿨라크화, 인위적 기근 등을 조직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소련 당국은 "신뢰할 수 없고" "반(反)소련 활동"으로 기소된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켰으며, 국경 근처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을 추방했다. 1937-38년에만 150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그 중 60만 명 이상이 총살을 당했으며, 그들의 가족들은 주로 러시아 - 시베리아, 우랄, 야쿠티아, 극동의 외딴 침체된 지역에 있는 수용소나 노동자 정착지로 옮겨졌다. 전체적으로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은 약 6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중 약 150만 명이 사망했다.

 

키이우 지역, 기근 때 빵을 받으려고 하는 현지인들. 1930년

러시아가 조직한 우크라이나의 기근

 

20세기에 소련 정권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세 개의 기근을 조직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발생한 가장 큰 기근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약 4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인들은 기근으로 황폐해진 마을들을 떠나 이주했었고, 이주하면 정부에게 상당한 혜택을 받았던 러시아인들은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지역(도네츠크, 루한스크, 드니프로, 자포리짜, 하르키우, 오데사, 미콜라이우, 헤르손 지역)에 대규모로 재정착했다.

 

소련 선전 포스터: "처녀지 토양을 키울 것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왜 러시아로 이주했는가?

 

우크라이나의 민족구성 변화는 20세기 초 약 250만 명의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일자리와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을 찾아 러시아 중부와 동부 영토로 자발적으로 떠났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1954년 소련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에 처녀지를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거의 8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그곳으로 이주했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당시 - 유지우카). 러시아인들이 지역의 산업 식민지화를 시작한 19세기의 사진

러시아인들은 왜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는가?

 

인구의 이주는 소련 때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특히 돈바스 지역의 산업 공장에서 일하거나 결혼하기 위해 등 우크라이나 영토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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