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예술

[우크라이나 화가] 알라 호르스카 (Алла Горська)

anamong 2022. 11. 1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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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전이 시작하기 전에 이 예술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 사람은 누구인지, 왜 젊은 나이에 죽었는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잘 몰랐다. 전쟁이 시작한 이후 내 고향의 역사나 다른 분야의 모르는 것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다가 이 이름을 자주 보니까 호르스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오늘은 이 위대한 우크라이나 사람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노력해볼 것이다.

 

알라 호르스카

알라 호르스카는 소련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고 결국 단순히 우크라이나인이라서, 명예와 진리의 수호자라서,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운동가라는 이유로 살해된 많은 우크라이나인 중 한 명이다.

 

파란 옷을 입은 자화상 / Портрет в синьому, 1955

1960년대 초호르스카는 바슬 스투스, 바슬 스모넨코, 이반 스비틀리치니 등 작가와 국민운동가와 함께 키이우에서 '창의적인 젊은이들의 동아리'이라는 클럽을 조직했다. 나중에 그 클럽은 우크라이나 국민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물론 동아리의 활동은 소비에트 국가보안위원회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또한 호르스카는 친구들과 함께 브키우냐 마을에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에서 저지른 대량 총격으로 살해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거대 공동묘지를 발견했고, 우크라이나 정치범과 통신하고 그들의 가족을 많이 돕고 있었다.

 


1965년에 우크라이나 지식인의 체포가 시작되었다. 알라 호르스카도 국가보안위원회의 심문에 여러 번 소환되었다. 이때부터 예술가와 KGB의 노골적인 갈등이 시작됐다. 호르스카가 지도하는 반데라주의자들의 조직에 대한 거짓 소문까지 전체에 퍼졌다 (현재 러-우크라 전쟁 중 러시아가 보급하는 선전과 뭐가 다른가? 거의 60년 지났는데 러시아가 똑같은 악랄한 방법을 여전히 이용하고 있다.)

"그녀는 끝까지 가고 있었다. 무서웠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가고 있었다..."
올레그 자레치키, 문화학자, 알라 호르스카의 아들이자 전기작가


소련 체제는 독립과 자유로운 의견을 용서하지 않았다. 호르스카의 공공 및 예술 활동, 그녀의 견해의 용기는 결국 ‘반소비에트 선동 및 선전’이라는 소련의 형사 범죄에 따라 기소되었다. 모두가 체포와 수용소로 추방될 것을 예상했지만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도끼를 도구로 사용해서 그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호르스카는 41세밖에 안 되었다...

 

1) 화난 타라스 / Гнівний Тарас, 1962-1963; 2) 이반 스비틀르츠니의 초상 / Портрет Iвана Світличного, 1965


호르스카의 작업은 모자이크 벽화, 회화 및 그래픽 작업으로 구성된다. 장르는 민속 예술, 우크라이나 전위 예술 및 보이추키즘 (창시자인 므하이로 보이추크 화가의 이름을 딴 예술 흐름).

1) 경지 / Рілля, 1961; 2) 집 / Хата,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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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스카는 민속 예술에 세심한주의를 기울였으며 그 형태와 색상에 감탄했는데 특히 색상은 민속 예술의 기초로 보았다.

"색상은 민족의 내용, 영혼, 역사, 얼굴이다"
알라 호르스카

1) 강변에서 / Біля річки, 1964; 2) 파란 소년. 홀로도모르 / Синій хлопчик. Голодомор 1964; 3) 검을 드는 사람 / Людина з мечем, 1962

그녀는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민속 예술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고하려고 노력했다.

 

'승리의 깃발' 모자이크의 스케치 / Ескіз мозаїчного панно "Прапор перемоги", 1968

호르스카의 유명한 모자이크 벽화 작품 중 마리우폴의 건물들에 있는 "생명의 나무"와 "황조롱이"라는 작품이 있다 (동인들과 공동 저술). 모자이크를 만드는 데 지역의 현지 재료가 사용되었는데, 따라서 "생명의 나무"의 일부 조각은 아조우스탈의 강철로 만들어졌다.

 

러시아인 군인들은 마리우폴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쓸어버리려고 노력했을 때 이 작품들을 파괴했다. 안타깝게도 모자이크는 복원할 수 없다고 한다.

 


예술가의 작품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없앤 적이 있다. 타라스 셰우첸코 키이우 국립 대학교의 건물을 '셰우첸코. 어머니'라는 모자이크로 장식하려고 했지만 그 작품은 '소련 이념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 비난은 우크라이나를 어머니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과 셰우첸코 작가의 인용문과 관련되었다.

 

'셰우첸코. 어머니' 스테인드 글라스 창의 스케치 / Ескіз  вітражу «Шевченко. Мати » , 1964 년

 

이 멍청한 노예들을 높이리라! 나 그들 곁에 언어를 방어로 만들리라!
'셰우첸코. 어머니' 스테인드 글라스 창의 스케치, 1964년


흥미로운 사실은 고르스카가 얄타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가정에서 자랐으며 성인이 되어서 자유 의지로 우크라이나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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