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

[우크라이나 역사] 홀로도모르 (Голодомор). 기록사진

anamong 2022. 11. 2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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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1998년부터 우크라이나 대통령령으로 매년 11월 넷째 토요일에 기념하는 홀로도모르 희생자 추모의 날을 제정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크라이나 역사의 비극적 페이지를 소개하는 글을 준비했습니다.

 

홀로도모르의 희생자 (사진: Alexander Wienerberger. 1933)


홀로도모르란?

홀로도모르(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을 의미함)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가축과 모든 식량 공급의 집단화와 몰수를 통해 우크라이나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강제로 압수함으로써 우크라이나 국민의 대량 학살이다.

우크라이나에는 1921-1923, 1932-1933, 1946-1947의 세 가지 기근이 있었다. 1932-1933년의 기근은 세계 20개국 이상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대량 학살로 인식되었다.

전체 소련 정부의 목표 중 하나는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의 민족을 파멸하는 것 외에도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인구의 모든 부분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통제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기근의 희생자들 (사진: Alexander Wienerberger, 1933)

저항

1928년 소련 지도부에서 개별 농민 농장을 국영 집단 농장으로 통합하는 집단화를 시작했다. 각 농민에게는 일정한 수의 근무일이 할당되었고, 그 대가로 자신과 가족 먹이기에도 부족한 식품으로 급여를 지급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개인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집단농장이라는 농업 조직을 강제적으로 심어준 정책은 강한 저항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제 집단화에 대한 농민들의 항의가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 국립 기억 연구소에 따르면 1930년에 4,000건 이상의 시위가 발생했으며 1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왜 우크라이나인가?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인과 자신의 차이를 매우 절실하게 느끼고 수세기 동안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박물관의 홈페이지]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정신적 개인주의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에 많이 어긋났다. 농민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기초였으며 소련의 통합과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크라이나는 대량 학살 범죄의 대상이되었다. 홀로도모르의 목적은 해방 투쟁을 약화시키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복종하는 대중을 만들기였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양을 가진 유럽 국가이며, 전 세계 체르노젬의 25%가 우크라이나에 있다. 스탈린은 러시아인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 농민의 노동과 우크라이나 땅 자체를 착취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의 대량 학살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전통, 문화, 언어를 보존하는 농민을 민족운동의 기반으로 생각했으며 시골을 먼저 공격했다. 곡물을 강제로 압수하기 시작했다. 집 수색을 벌였을 때 사람들에 대한 신체적이고 도덕적인 학대까지 했다.

1932년 11월에는 곡물뿐만 아니라 판매하거나 식량으로 교환할 수 있는 기타 식량과 재산도 농민들에게서 빼앗기로 결정했다. 다른 소련의 공화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심했던 1933년 첫 주에 스탈린은 농민들이 탈출할 수 없도록 공화국의 국경을 폐쇄했고, 농민들이 구걸하러 온 ​​도시에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티모시 스나이더 "피의 땅"]

"적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파멸될 것이다" - Alexander Wienerberger 사진가가 사진에서 남긴 기록

길거리에서 시체를 수거하는 것을 볼 때 간담이 서늘해진다. 고통에 울부짖는 어머니에게서 죽은 아이들을 뺏고 있었고, 죽음으로 입밖으로 말을 내지 못한 어머니의 메마른 젖가슴에서 살아 있는 아이들을 빼앗고 있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신음하고 있었다. [Wienerberger는 우크라이나에서 본 것에 대한 기록]

어머니와 그의 굶은 아이들 (사진: Alexander Wienerberger, 하르키우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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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규모

1933년 봄까지 우크라이나의 사망률은 재앙 수준에 이르렀다. 홀로도모르의 절정은 1933년 6월이었다. 그때 당시 1시간에 약 1,170명, 1분에 약 20명씩 사망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한 건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용 가능한 정보는 기근의 엄청난 규모를 분명히 증언한다. 키이우주의 의료 기관에서 1933년 4월에만 이 지역에서 493,644명이 기아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전체적으로 1932~33년 동안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330만 명 이상의 우크라이나인들은 굶주림과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거의 ​​같은 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망했습니다. 대부분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은 사망자 수가 700만 명에 달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굶어죽은 사람들을 위한 공동묘지 (사진: Alexander Wienerberger, 하르키우주, 1933)

소련 당국은 홀로도모르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한 사진은 제거되고 파괴되게 했다. 일부 사진가만이 우크라이나의 인공 기근에 대한 증거를 사진으로 포착하고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사진들 덕분에 굶주림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사진 속에서 긴 줄을 서는 사람들, 식량을 얻기 위해 도시로 이주하는 농민들, 집없는 아이들의 무리, 비극적으로 낮은 생활 수준... 그리고 죽음의 다양한 장면.

 

시골 사람들은 도시에서 식량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올라간다 (사진: Alexander Wienerberger, 하르키우주, 1933)
빵을 받으려고 서는 줄 (사진: Alexander Wienerberger, 하르키우주, 1933)
기근의 희생자들 (사진: Alexander Wienerberger, 하르키우주, 1933)
보칸 사진작가의 가족은 점심을 먹고 있다. 1933년 4월 2일 사진의 기록: '300일(삼백!) 동안 빈약한 저녁 식사를 위한 빵 한 조각 없이'
기근으로 인해 부은 아이들. 자포리자주, 1922
영안실. 홀로도모르로 죽은 아이들의 시체. 미콜라이우주, 1922
묘지로 시체 운반. 헤르손,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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